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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머컬처

퍼머컬처의 시작은 밭멍에서

by 지반티카 2022. 8. 7.

퍼머컬처란?

 

퍼머컬처는 'Permanent Agriculture'을 줄이고 합친 용어로, 한국어로는 지속가능한 농법이라고 한다.

지구와 인간이 공생 가능한, 그래서 지속 가능한 농법이다. 그리고 농법을 포함한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유기농과 달리 비료와 퇴비를 주지 않고, 갈지 않아도 되는 땅을 만들어 식물들이 알아서 자라고 열매를 맺도록 한다.

그리고 또 그 자리에 피어난 식물들이 또 자라고 열매를 맺도록 두어, 산 속의 숲과 닮은 생태계가 만들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퍼머컬처를 기반으로 만든 밭을 '숲밭'이라고도 표현한 것을 소셜 미디어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사람이 개입하여 밭을 가꾸되, 자연 농법처럼 씨앗을 뿌려놓고 하염없이 기다리지도 않고, 

유기농처럼 비료 퇴비를 열심히 쏟아붓는 것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마법이 퍼머컬처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연히 인스타그램을 하다 만난 밭멍, 강원도 영월의 나뭇잎밭 농장  

 

작년 가을, 작게라도 텃밭이 있으면 좋겠다고 처음 생각했을 때까지만 해도 퍼머컬처에 대해서는 무지한 상태였다.

다만, 식재료를 구해보니 비료나 농약을 쓰지 않고 건강히 키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채소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막 깨달았을 뿐이었다 (깨달음의 배경에는 평소에 99% 무오신채 채식으로 챙겨먹는 쪽으로 변화해온 식습관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포스팅을 하겠다). 

 

밭멍의 나뭇잎밭. 찾았는가?

 

그 때 마침 밭멍이라는 곳에서 '밭멍 프렌즈 1기'를 모집한다는 글을 인스타그램에서 보게 되었다.

설명을 보아 하니, 참가비나 식비, 숙소비 같은 게 따로 없이 일주일을 가서 지내며 일을 돕는 프로그램인 것 같았다. 

필요한 자격도 따로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청년이어야 된다는 조건 빼고는.

게다가 밭이 나뭇잎밭 모양이었다. 드론으로 위에서 찍은 각도에서 보니 흥미로웠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흥분이 됐다기 보다는, 가면 예쁜 밭 구경도 하고 밭일도 해보고 좋겠다는 생각 정도의 뜨듯미지근함이었다.  

뭐 이런 프로그램이 다 있지 싶었지만, 돈이 없는 내게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당시 농사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하고, 귀농귀촌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닌 나로서는, 밭멍은 정말 '우연히' 만났다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여기서 잠깐, 귀농귀촌 알못을 위한 용어 TIP!

 

밭멍 프렌즈에서처럼 농가에서 숙식을 제공 받고, 보답으로 농장의 일을 돕는 것을 우핑 (Woofing)이라고 한다. Woofing은 농장의 부족한 일손을 거들어 돕는 것이 목적이다. Woof Korea 사이트는 농장과 도움을 주고 싶은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농가에서 일하는 경험을 포함해서, 여행과 결합한 형태의 농업 체험 프로그램들이 찾아보면 생각보다 많다는 것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작년 가을에도 이런 프로그램들이 많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은 찾아보니 국내의 약 8개 지역에서 진행되는 시골언니 프로그램, 지역에서 일정 기간 살면서 다양한 지역 행사 기획해보기 등 더 많은 프로그램들이 생겨나고, 활성화가 잘 되고 있는 분위기인 것 같다. 

 

신청은 했지만... 오지 않는 연락

 

신청서 작성은 네이버 폼을 통해 간단히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기다려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치열한 경쟁에서 떨어진 건가? 이제 청년이 아니게 된 나이가 되어서?!?' 하고 생각하며 스스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인스타그램에서 내 이름을 걸어놓고 애타게 찾고 있는 것을 보고 또 한 번의 충격을 받았다.

 

아니, 왜...! 전화를 하지 않고!

 

DM을 보내 연락이 닿고 나서야, 전화번호를 잘못 입력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입력된 전화번호로 연락하니 내가 아니라고 했단다.

온갖가지 번호로 다 전화해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어서 결국 게시물을 올렸다고...

본의 아니게 나를 찾느라 고생을 하게 만든 꼴이 되었다. 크게 반성했다.

결국 청년이 맞았지만 번호를 잘못 입력하는 실수... 그래, 할 수도 있지만 다시는 하지 말자고 말이다.

(청년인 것과 실수를 하는 것 사이에 연관 관계가 없는데도 이렇게 생각이 되어지다니, 사람의 사고라는 것은 신기하고도 무섭다). 

 

해 질 무렵의 밭멍.

 

드디어 통화가 되었을 때는 갈 수 있는 일정을 이야기해서 맞추어놓고,

'내가 찾아지지 않아 놓쳤던' 레코딩 줌 영상을 보는 것으로 사전 교육을 마쳤다.

교육 영상은 밭멍이 어떤 곳에 있고,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느 정도 크기의 농장인지 등등을 알려주는 내용이었다. 

덕분에 영월에 상동읍이라는 곳이 있다는 것과, 상동읍이 인구가 점점 감소하여 소멸 위기에 처한 지역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밭멍이 있는 영월로 떠나요 

 

영월에 가는 것은 태어나서 두 번째로, 어렸을 때 래프팅 캠프 이후 처음이었다.

코로나가 터진 이후 처음으로 서울 밖을 벗어나게 된 여행이기도 해서, 설레는 마음으로 갔다.

 

다행히 서울에서 영월까지는 버스를 타면 한 번에 갈 수 있다. 서울 경부 터미널에서 출발한다. 

하루에 네 번, 일반 버스만 있다. 소요 시간 두시간 반, 요금은 13,100원.

나는 한시 반에 출발하는 버스를 이용해서 갔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을 하게 되었는데, 지금 기억으론 3시 40분 정도에 내렸던 것 같다. 

 

많은 시골의 터미널들이 그렇듯 영월 터미널은 아주 오래되었고, 딱히 가방을 내려놓고 기다릴만한 장소가 없었다.

화장실에 다녀온 뒤로는 임대로 내놓아진 빈 카페 앞 테이블 위에 가방을 올려놓고 멍하니 서 있었던 것 같다.

(참고로 영월 버스 터미널 화장실에는 휴지가 없으니, 챙겨가는 것이 좋다).

조금 지나고 난 뒤에, 조그만 차에 탑승을 하게 되었다. 여행용 배낭에 옷을 한가득 싸와서, 차에 비해 배낭이 많이 큰 느낌이 들었다. 

 

마중을 나오신 분들은 세 분이었는데, 그 중 한 분이 전화 통화를 하며 목소리로 먼저 만난 밭멍의 김지현 대표님,

다른 한 분이 손에코 실장님이었다.

또 다른 한 분은 나보다 어린 동생으로, 방을 같이 쓰면서 매일밤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지게 된다.

사진을 좀처럼 찍는 일이 없는 나의 모습들을 많이 담아주었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에 기억에 남았던 것은 창문을 통해 계속해서 펼쳐지는 산과 하늘, 그리고 흐르는 물이었다. 

래프팅을 할 때는 강에서 산을 올려다보게 되니 높고 까마득한 느낌이었는데, 차 안에서 볼 때는 산세가 좋다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멋이 있었다. 웅장하기도 하고. 서울 곳곳에도 산이 있지만, '와, 산세 좋다!' 하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밭멍 프렌즈의 숙소로 사용되기도 했던 밭메이카. 식사와 회의를 하는 공간으로도 쓰인다.

 

차로도 30여분을 지나 도착하게 된 밭멍. 도로의 아래쪽, 하천 앞에 위치한 '밭메이카'를 가장 먼저 들어가보게 되었다.

같이 식사를 하고 회의를 하는 부엌이 있는 공간으로, 며칠 동안 지낼 숙소 방이 있는 건물이기도 했다.

밭메이카의 위층에는 밭멍 스테이가 있다. 오가는 손님들은 있었지만, 다음날부턴 밭일에 매진해서인지 생각보다 손님들과 마주친다거나 존재감을 느낄 만한 일은 드물었다.   

 

첫날은 이동과 식사를 한 뒤에 별로 한 일이 없었다. 시골답게 빨리 어두워지는 편이어서, 방에서 같이 지내게 된

동생과 함께 처음 만난 사람들이 할 법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우연히도, 둘 다 남해에 대한 호감도가 매우 높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여행만 해도 좋은데, 남해에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이야기들을 나누며 같이 꿈을 꾸다 보니 더욱 더 빨리 친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옷에 자수를 놓으려고 야무지게 챙겨온 도구들을 펼쳐놓았었던 그녀는, 나랑 이야기를 나누느라 결국 가는 날까지 자수를 한 땀도 놓지 못했다).    

 

 

'밭멍'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빴던 하루하루 

 

매일 이렇게 느긋할 거라 예상하지는 않았지만, 두 번째 날부터는 정말 바빴다. 

아침에는 하루 사이에 정이 생겨버린 룸메이트 동생, 손에코 실장님, 김지현 대표님과 함께 넷이서 감자 캐기를 했다.

몇 년 전 이모를 도와 고구마를 캤던 경험이 캐기 커리어의 전부였지만, 농장의 소중한 수확물인만큼 '상처를 내지 않고 조심히 파낸다'는 마음으로 임했다. 물론, 마음과 같지 않게 감자 캐기는 흘러갔지만 말이다.

 

일단 면적이 넓었다. 넷이서 흩어져 호미로 땅을 파고 또 팠지만, 감자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한 사람이 아주 작은 감자 몇 알을 캐내면 또 그 주변에서 다른 사람이 감자를 발견하는 식으로 우리의 '감자봤다'는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많이 심었는데 생각보다 수확량이 적은 것 같다고 실장님과 대표님은 이야기했다. 대표님이 얘기했던 것중에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은 것은,

 

괜찮아, 안 보인 애들(감자들)은 흙으로 돌아갔을 거야.

 

매우 사실이면서도 묘하게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캐고 싶었지만 흙으로 돌아갔다는데 어쩌겠는가. 수확량이 많았다면 더 신났겠지만,

그렇지 않았어도 감자를 캤다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새로운 경험이었기 때문에 그걸로도 충분했다.

 

우리가 캔 감자. 올망졸망 서로 다른 사이즈가 귀엽다.

 

아무래도 감자 캐기 전이었던 것 같은 호밀 씨앗 뿌리기는 수월하고도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아무렇게나 흩뿌리는 손에코 실장님의 손모양새를 흉내내어 마음껏 아무렇게나 뿌렸다. 그렇게 뿌려져 작년 겨울쯤 싹이 텄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던 호밀은 올해 봄에 수확되었다는 뿌듯한 소식까지 함께 전해주었다.

 

두 번째 날 뒤에는 매일 무엇을 했는지 사실 상세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10월 초인가 중순에 한 번 왔다가 또 온 다른 동생과는 첫 만남부터 비바람정이라는 정자에 시래기와 옥수수 널기를 함께 했다.

 

시래기를 널기 전의 비바람정. 곧 옥수수가 옮겨지고, 시래기로 가득차게 된다.

 

어색할 새 없이 다져진 동기애로, 우리는 캐내어진 상태로 비닐 하우스 안에서 잘 마르고 있던 땅콩들을 블랭크 하우스로 옮겨 썩은 것과 건강한 것을 골라내는 작업도 함께 했다. 밭멍에서 야심차게 준비 중이었던 주말 농장 체험 프로그램인 시고레바트로의 할로윈 팜 파티를 준비하는 일도 말이다. 할로윈 장식을 바늘에 꿰는 일, 호박을 파서 씨를 제거하고 펌킨 카빙 (pumpkin carving)을 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 놓는 일 등등.

 

호박씨를 골라내는 일은 끝이 없어, 그 자체로 수련이었다!
호박 씨와 속을 긁어내고 태어난 펌킨 카빙 작품들.

손이 비는 순간 "뭐하면 돼요," 를 가장 많이 연발했던 것 같다. 밭멍 스테이와 시고레바트로 예약 문의 전화 받으랴, 밭일 하랴, 왔다 갔다 바쁜 대표님이 안 계실 땐 자연스레 두 번째 대빵(?)인 손에코 실장님에게 묻곤 했다. 실장님은 그냥 쉬어도 된다는 친절한 말씀도 해주셨지만, 사실 쉴 시간은 없었다. 핸드폰은 몇 시쯤 되었나 확인하려고 보는 용도로 쓰였다. 밭을 보면서 멍을 때릴 수 있는 농장이라고 해서 밭멍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멍 때릴 시간이라곤 없었다. 과장이 아니라, 나는 회사 다닐 때도 그렇게 바쁘게 일해본 기억이 없었다. 같은 표현을 반복하는 것은 식상해서 좋아하지 않지만 와, 정말 바빴다. 

 

 

우리가 도움이 되고 있긴 한 건가요?

 

룸메이트 동생과 나는 그 점이 궁금해 실장님에게 계속 묻곤 했다. 우리가 일을 하는 것이 실제로 도움이 되고 있는지를 계속 생각했던 것이다. 놀랍게도 실장님은, 밭멍 프렌즈들이 일주일씩 와 있었던 10월 한 달 중 마지막 주였던 그 때 모인 우리들이 가장 일을 많이 도와주었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천사 같은 표정으로 천사 같이 착한 말만 해주는 실장님이라 그런가보다 하고,  일을 더욱 더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면서, 기분까지 좋아지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팜 파티까지 알차게 즐기고 오다

 

머물렀던 일정의 마지막은 팜 파티였다. 사실 그 날 일손 필요한 일이 제일 많았다.

시고레 바트로 할로윈 팜 파티 참여자들을 위한 커리 만들기, 밥 준비하기, 분장하기, 어울리는 의상 찾아 입기 등등. 영월에 오기 전, 할로윈 의상을 챙겨오라고 해서 마녀 같아 보이는 검은색 치렁치렁한 겨울 치마를 하나 가져가 입은 게 끝이었다. 그것만으로는 할로윈 분위기가 나지 않아서 도끼 머리띠를 했는데 나름 잘 어울렸다.

 

경고: 사진이 커서 깜짝 놀랄 수 있습니다.

룸메이트 동생은 파티 전에 먼저 올라가서 참여하지 못했고, 손에코 실장님은 체크 무늬 셔츠에 멜빵 바지를 입은 허수아비가 되었다. 대표님은 아주 인상적이게도, 조커로 분장을 했다. 아주 철두철미하게 하얀 칠을 한 얼굴, 붉은 입술이 인상적이었다. 아이들이 정말로 무서워했다.

 

파티가 다 끝난 후 밭멍 프렌즈들과 같이 남긴 사진.

옥수수를 같이 널었던 동지는 분장을 하지는 않았지만 장기를 살려 팜 파티에서 팜 파티를 위해서 달려온 밭멍 프렌즈 한 분의 피아노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음악을 하고 싶었지만 사무직 회사원이 되었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아이들과 가족 단위로 와서 준비한 파티를 즐기는 참여자들과 함께, 블랭크 하우스에서 저녁을 먹었다. 열시가 넘어서야 행사 마무리까지 끝났다. 한시적으로 모두의 가수가 되어주었던 옥수수 시래기 동지 동생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동생이 차로 집 앞까지 태워다주어서, 밭멍에서 지내는 동안 썼던 돈은 영월 갈 때 들었던 버스비 13100원뿐이었다.    

 

혼자 나와서 살면서 처음으로 일주일 가까이 집을 비웠던 짧은 우핑 겸 여행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집에는 냉기가 돌았지만, 잠에 드는 밤은 아주 행복했다. 밭멍을 만나 나도 인지하지 못한 사이, 밭멍 프렌즈가 되어 스리슬쩍 입문한, 퍼머컬처의 시작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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