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작년 10월, 밭멍을 다녀온 뒤로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타고난 낙관주의자이자 이상주의자의 마음으로, 엄청난 꿈을 꾸게 되고 만 것이다.
나의 땅과 집을 마련해, 집을 중심으로 넓은 땅에 먹고 싶은 모든 먹거리, 보고 싶은 모든 꽃, 만지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나무들을 죄다 심어보고 싶게 되어버렸다. 이럴 수가...!
밭멍을 갈 때까지만 해도, 나는 베란다가 없어도 상추나 바질 같은 아이들을 키울 수 있을까,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고 무엇이 필요한 것인가와 같은 아주 사소하고도 기초적인 질문들에 대한 궁금증만을 품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갑자기, 땅과 집이 갖고 싶어져버린 것이다.
요가와 명상을 하며 점점 가진 것은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사람이 말이다. 귀농귀촌에 대한 꿈을 품고 다녀온 것도 아니었는데, 서울은 땅이 너무 비싸서 할 수 없으니까 내려가서 찾아야겠지, 어디로 가면 좋을까 등등의 생각을 자연스레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더 큰 문제는
그러나,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마음 속에선 이미 본 적도 없는 울창한 텃밭과 정원에서 신나게 풀을 만지고 있는 내 모습을 그리고 있었지만, 사실상 마음에 그리는 그런 모습을 만들기엔 예산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상태였다. 게다가 밭멍에 가본 것, 그리고 할아버지가 새로운 화분에 옮겨심어주셨던 몇 가지 관상용 식물을 키워본 일, 어렴풋이 기억나는 어릴 적 주말농장의 기억 외에 식물을 큰 규모로 키워본 일이란 전무했다. 나만의 텃밭과 정원, 집을 생각만 해도 두근두근하고 벅찼지만, 동시에 자신이 없었다. 과연 해낼 수 있을까...?
마음 같아선 밭멍에 더 오래 머물면서 일도 돕고 배우고 하고 싶었지만, 하던 요가와 명상 수업이 있었다. 내가 운영하는 거니까, 하고 편하게 갑자기 접을 일이 아니었다. 코로나 이후로 온라인으로 함께 해온 여러 사람들과 일궈온 결실이었다. 나는 그것을 버릴 마음이 없었다. 그렇다고 계약 기간이 한참 남았는데 갑자기 짐을 싸들고 마음 가는 대로 훌쩍 어딘가로 내려가 전국 방방곡곡을 쏘다닐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피복이 해보고 싶었고, 해보고 싶은 피복의 스케일은 '가이아의 정원'에서 본 설명을 그대로 실천해보는 것이었다. 신문지와 종이 박스, 헌 옷 등 생분해되는 안 쓰게 된 자원들을 넓은 땅 곳곳에 깔아 언제까지고 자연분해되도록 두며 그 과정을 지켜보고, 영양분을 흡수한 땅에 모종과 씨앗을 심기 시작하는 것 말이다. 해보면 되잖아, 하고 말할 수도 있는 소박한 바람일 수도 있지만, 또 땅이 없는 자에겐 염원이라고 해도 모자라지 않을 그런 엄청난 일이었다. 당장 이사 가지도 않을 건데, 서울 어딘가에 그렇게 할 수 있는 땅이 어디 있겠으며 또 있다고 한들 남아도는 땅이라도 과연 임대를 해줄 것인가? 재개발과 신축을 목빠지게 기다리는 사람이 몇인지도 모를 도시에서 말이다.
서울 어딘가에 퍼머컬처 디자인 컨설팅을 해주었던 곳이 있다고, 밭멍의 김지현 대표님이 거기서 텃밭을 해봐도 되는지 물어봐주겠다고 했었다. 옥상에 텃밭이 있는 건물이라고 했는데, 물어보니 건물에 살고 있는 분들이 텃밭 가꾸는 재미에 한창 부지런히 옥상을 오르내리고 계시다는 대답을 받았단다. 조금 슬프고 아쉬웠지만, 좋은 소식이었다. 옥상이라면 지금 살고 있는 건물에도 있었지만, 작년 여름 방수공사를 하면서 그나마 몇 개 심어져있던 나무와 흙을 모조리 치워버려 휑해진 상태였다. 새롭게 공사는 마쳤어도 혹시나 물이 샐까 싶은 마음이 건물주로서는 들 수 도 있는 일이었다. 텃밭을 가꾸게 해줄 것 같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나만의 텃밭을 가질 수 있을까? 막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그나마 할 수 있었던 것은 퍼머컬처 관련 책을 읽는 것이었다. 밭멍에서의 룸메이트 동생이 퍼머컬처 책을 가져와 읽고 있었던 것이 생각난 것이다. 운 좋게도, 동네 도서관에는 생각보다 퍼머컬처 관련 책이 많았고 신간도 종종 들어왔다. 상호 대차도 이용할 수 있어, 신나게 이 책 저 책 빌려읽으며 스펀지처럼 새로운 지식을 흡수했다. 오랫동안 책을 보지 않고 지냈었는데, 공부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었다. 책을 빨리 읽는 편인데다 과학도 좋아했어서 - 고등학교를 다닐 때, 그리고 대학 입시 시험 때 선택했던 과목도 마침 화학이었다 - 원소 이름이 나오거나 딱딱한 용어가 나와도 크게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 이후부터는 줄곧 공부를 많이 했어야 하는 상황을 유감스럽게 생각해왔던 참이었는데 (사회에서 학력은 크게 중요한 요소가 아닌 것을 깨닫게 되었으니 말이다),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게 도움이 된다고 느끼는 감사한 순간이었다. 읽는 동안에는 이건 나중에 땅이 생기면 해봐야겠다, 이런 식물도 있구나, 하면서 계속 후를 기약했다. 땅도 집도 없었지만, 예측할 수 없는 여러 변수로 밭멍에 갈 기회도 좀처럼 다시 생기지 않았지만, 책을 읽는 것과 혼자서 꿈을 키우는 시간은 제법 즐거웠다.
밭멍이 선정된 렉서스 코리아 영파머스 MOU 체결에 함께 하다
2021년 11월, 김지현 대표님이 서울에 올 일이 있다고 연락을 주었다. 밭멍에 머물고 있는 밭멍 프렌즈 2기 청년들과 함께 온다고 했다. 점심을 같이 먹기로 했다. 대표님은 시간이 되면 그 날 밭멍이 선정된 렉서스 영파머스 (Young Farmers) MOU 체결식에 같이 가도 좋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점심 뒤에도 조금은 시간이 되어, 얼떨결에 같이 가보게 되었다. 롯데월드 몰 안의 렉서스가 전시된 공간의 한 회의실에서 진행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카페가 있고, 예술가들의 예술품들을 전시하고 팔기도 하는 곳이었다. 카페에서는 농부들이 키운 우리 농산물을 이용한 음료를 팔고 있었다. 밭멍의 허브나 채소도 음료로 탄생하는 걸까?
렉서스 코리아의 영파머스는 젊은 농부들이 더욱 더 활발하게 농산물을 생산하며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후원 프로그램인 것 같았다. 선정된 농부님들은 정말 여러 지역에서 각기 다른 식물들을 재배하고 있었다. 선정된 농부들끼리 서로 교류하며 좋은 관계로 지내는 것도, 일손이 부족하거나 서로의 조언이 필요하거나 할 때 더욱 더 도움이 되겠구나 싶었다. 추구하는 재배 방식이나 삶의 방식이 다르더라도, 서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지지해주고 응원을 받는 것은 농부로서의 삶을 지속함에 있어서 큰 힘이 되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는 길을 선택한, 또는 많은 사람들과 걷던 길을 떠나온 사람들이 선택한 삶의 방식인만큼 더욱 더.
나는 정말 그럴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또 대표님이 같이 찍자고 하여 농부들 각각 찍는 MOU 체결식 기념 사진도 같이 찍게 되었다. 뒤에서 사진 찍는 거 구경하려고 했는데, 딱 걸렸다. 아무 생각 없이 입고 나온 후드티를 입고 동네 마실 가듯 쫄래쫄래 따라와선, 정장 입으신 김지현 대표님 옆에, 그것도 가운데 서게 되고야 말았다. 그렇게 나는 10월의 밭일을 함께 했던 대표님과 실장님, 그리고 그 날 처음 만난 밭멍 프렌즈들과 한 사진에 담기며, 밭멍의 기념비적인 한 순간에 흔적을 남겼다. 밭멍 프렌즈 중 한 사람이 사진 찍고 나서 했던 말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사진 찍히고 나면, 계속 같이 가는 거라고, 나중에 누구 하나 없어져 있으면 이 사람 어디 갔냐고 할 거라고. 그 말을 듣고선 왠지 나도 모르게 발을 담가버리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또 나는 나대로, 이건 생태 정원을 가꾸며 지구와 더불어 사는 삶을 살아내기 위한 복선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며, 소셜 미디어에 단체 사진을 올리고야 말았다. 발이 담겼는데 뺄 생각은 커녕, 기쁘게 더 깊게 담그며 물 아래 모래에 발자국을 꾹! 남긴 것이다.
불쑥 찾아온 기회, 2022 토요타 주말농부
올해 봄, 김지현 대표님이 불쑥 토요타에서 주말농부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전해주셨다. 신청 시작일은 소식을 전해주신 그 날로부터 가까운 날이었다. 용인에서 한다는데, 집에서 가까운 편은 아니었다. 팀당 한 평의 텃밭이 주어진다고 했다. 혼자서 한 평을 온전히 가꿀 수 있을까? 염려스러웠다. 한 평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 왔다. 감이 안 오는 크기의 땅에 얼마나 심을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몇 년동안 꽃을 배우고 있는 친구에게 같이 하겠냐고 물었지만, 주말 중 하루는 꽃을 배우러 가니 매주 주말 시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서 어려울 것 같다는 답장이 왔다. 밭멍에 다녀온 사람들 중에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 딱히 없었다. 다들 용인에서 먼 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하고 싶었다. 같이 할 사람을 애써서 찾거나, 없다고 해서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오히려 혼자 하면 더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혼자서 신청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래서 될지 안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신청 시작일 오전에 바로 신청을 해버리고 말았다.
신청을 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룸메이트였던 동생은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꼭 될 거예요. 그 말을 듣자, 정말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왠지 이미 된 것 같았다. 그래서, 신청도 마감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정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주말농부 프로그램 오리엔테이션이 있는 날 저녁에 있는 일을 취소하고, 주말농장이 시작되는 첫 날에는 가족의 생일이었지만 가지 못할 것 같다고 사과하고 대신 떡케익이 당일 낮에 도착하도록 선물로 주문했다. 미리 잡혔던 일정인 양 말이다! 그리고 거짓말같이, 당첨자 발표 명단 첫줄에 이름이 쓰여있는 것을 확인했다. 정말 정말 기뻤다. 아직 많이 더워지기 전 5월 중순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된 뒤에는 부랴부랴 토종 씨앗 도서관에 가서 그 시기에 심으면 좋을 식물들을 추천 받아 씨앗들을 대출했다. 텃밭을 정말 가꿀 수 있게 되는 건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다음 포스팅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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