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포스팅은 '밭멍을 다녀온 이후 생긴, '약간의 문제'' 라는 포스팅의 후속편입니다.
2022 토요타 주말농부, DAY 1: 지속가능한 지구 텃밭
사전 오리엔테이션을 비대면으로 마치고, 며칠 동안은 가늠도 안 되는 한 평에 심을 식물들을 가상의 정사각형 안에 배치해보았다. 먹고 싶은 식물들과 그 동반 식물, 대출한 씨앗들의 동반 식물들도 많이 찾아봤다. 디자인은 텃밭 첫날 전날이 되어서야 완성되었다.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텃밭 디자인을 종이에 옮겨 적고, 핸드폰에도 저장해두었다.
5월의 어느 토요일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용인으로 출발했다. 집에서 가는 길은, 서울 버스에서 광역버스로 갈아타고, 용인터미널에서 내려 시외버스를 타야 하는 1시간 40분 남짓의 긴 여정이었다. 검색해보니 앱에서는 시외버스 시간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못 타면 택시라도 타야지, 하면서 터미널에 갔는데, 다행히 오래 기다리지 않고도 시외버스를 탈 수 있었다. 농장도 버스 내린 곳에서 가까워서, 오픈 행사 시작 전에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이 되었다.
웰컴 키트를 받아 마음이 드는 곳에 앉았다. 하늘 아래 색색깔로 바람에 날리는 플래그들이 예뻤다. 하얀 구름과, 조금씩 많아지는 사람들. 5:1이라는 경쟁률을 뚫고 - 토요타 주말농장도 10년차, 그 중 가장 경쟁률이 치열했다고 한다 - 당첨이 된, 나의 텃밭 이웃이 될 사람들이었다. 함께 온 가족들, 커플들, 마음 맞는 친구들끼리 온 사람들. 혼자 다니는 것을 편안해하고 어색해하지 않았으므로, 혼자 온 것이 나는 외롭지 않았다. 좋은 날이었다.
퍼머컬처는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입니다
오픈 행사에서는 김지현 대표님에게 사전에 부탁 받았던 감사의 인사를 농부 대표로 하게 되는 영광스러운 기회가 있었다. 두 사람 중 나는 먼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요청대로 짧게 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작사를 하며 3분, 노래 한 곡 길이에 대한 감각이 있었고, 그리고 요가 수업을 하면서 주제를 2분 안에 나누는 연습으로 시작하여 이젠 일상이 되어버린 나머지, 요점을 담아 짧고 굵게 이야기하는 데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토요타 주말농부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퍼머컬처가 지속 가능한 농법일 뿐만 아니라, 지구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여, 밭멍에서 만난 퍼머컬처를 내 삶 안에 들이기로 선택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옳았음을, 현명했음을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느낀다). 그리고 한 번 선택하면, 성에 찰 때까지 쭉 해보는 편이다. 그래서, 입에서 나오는 말이 내게 부담감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적당한 무게감이었다. 퍼머컬처라는 이름이 새로울 뿐, 알고 보면 내가 지금껏 수련하며 실천해온 요가와 명상과 다를 것이 없었다. 해보지 않은 일이니 막연하기도 했지만, 김지현 대표님을 비롯해 농장에서 교육을 맡아 도와줄 선생님이 있으니 따라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믿음이 있었다.
텃밭은 40여개, 그 중 어느 위치에 받을지는 호미뽑기로 진행이 되었다. 가나다 이름 순서대로 호명되면 나와서 호미를 뽑는 것이다. 나무 렉에 걸린 여러 호미 중 원하는 걸 골라 호미 손잡이 아래쪽 동그란 부분을 보면 번호가 적혀있었다. 어쩐지 나는 원래 순서보다 뒤늦게 호명이 되었고, 뽑은 호미는 37번이었다.
애걔, 한 평이 이렇게 작다고?!
신청 전에는 텃밭 크기가 한 평이라고 해서, 혼자 하기에 버거운 크기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최대 네 명까지 팀을 꾸려 같이 신청을 할 수 있어서, 처음엔 밭멍 프렌즈들 중에 같이 할 사람이 있는지 알아보았다. 하지만 다들 용인에서 멀리 있었다. 주변에서도 같이 할 만한 지인이 없었다. 김지현 대표님은 혼자서 해도 된다고 했다. 그래서, 가늠이 안 되는 한 평이라는 크기가 걱정스럽기는 했지만 어쨌든 신청을 했던 것이다.
토요타 측에서 지원해준 모종이 몇 개 있어서, 그 모종들을 받아들고 농장에 들어갔다. 토마토와 바질, 딜과 한련화, 메리골드. 정말 아는 것이 없어서, 한련화와 메리골드는 어느 게 어느 것인지도 김지현 대표님에게 다시 물어봐야 했다. 눈에 들어왔던 것은 37번 밭은 농막 앞에 있고, 듬성듬성 호밀이 푸르게 올라와 있었다는 것이었다. 1번부터 시작하는 밭의 절반은 흙만 있는 밭이었고, 중간부터 40번까지의 밭은 호밀이 심어진 밭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 흙만 있는 밭이었는데, 호밀이 있는 밭에 배정을 받았으니 호밀을 뽑지 않고 같이 키우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밭에 두둑을 여기 저기 만들고 싶었는데 그렇게 하기에는 뭔가 한계가 느껴졌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한 평은 많이 작았다!
생각과는 다른 틀밭이었지만, 일단, 호밀이 심어지지 않은 부분을 찾아 부숙토를 적당히 얹고 주변 흙과 섞어 물을 듬뿍 주었다. 그리고는 모종 심을 위치를 정했다. 동서남북 방향을 정확히 볼 줄 몰라서, 핸드폰 나침반으로 확인한 방향과 해의 위치을 감안해서 토마토와 바질, 메리골드를 밭 한쪽에 심고 멀리 떨어진 반대쪽에 딜과 한련화를 심었다. 한련화는 덩쿨이라 밭의 가장자리에 심었다.
제공 받은 모종 외에 심고 싶은 모종을 가져와도 되었지만, 차가 없었기 때문에 씨앗 도서관에서 대출한 토종씨앗 몇 종과 집에 있던 씨앗, 종묘사에서 산 씨앗 몇 종만 딸랑 가져와서 심었다. 집에서 고심해서 끄적인 배치도대로 심어볼까 했지만, 현실은 머릿속 이상과는 전혀 달랐다. 모든 것이 그런 법이지만, 참 달랐다. 그래서, 식물별로 찾아본 씨앗 심는 갯수와 간격 등을 동서남북을 고려해 기억나는대로 심었다. 사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배치도는 볼 겨를도 없었다. 다들 사오거나 집 앞 마당에서 캐온 모종을 심고 있는데, 빈 손으로 와선 씨앗만 몇 알씩 심고 있으니 어떤 분들이 씨앗을 심는군요, 하고 신기하게 구경하고 가기도 했다.
정말 끝까지 공간 활용을 해서 빽빽히 심어보겠다 다짐을 하고 왔지만,
어쩐지 많이 부족했다. 나중에 다른 식물들을 더 심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많이씩 심지도 않았다. 하지만 종류만큼은 정말 다양했다! 상추와 흰 당근, 케일과 비트, 루꼴라와 바질, 쪽, 펜넬, 오크라와 차이니즈 캐비지 (청경채와는 다른 종인 것 같았다), 고수, 오이, 강낭콩 등등. 당일에 오프닝 행사 준비와 초보 농부들의 식재를 도와주러 온 밭멍 가족 자루도 내가 심는 모양새를 보더니 뭘 그렇게 많이 심냐고 그랬었다. 그래서 "욕망의 텃밭이에요" 라고 대답했더니 자루는 나중에 밭멍 프렌즈들에게도 이렇게 얘기했다.
지반티카의 텃밭은 욕망의 텃밭이에요!
나중에 뭘 심었냐는 질문을 주변에서 들었을 때에도, 하나 하나 떠올리며 대답을 했다. 그러면, 다 말하기도 전에 사람들은 참 많이도 심었다고 말했다. 다 얘기하지 않았는데, 더 말할 수 없게 되는 상황에선 가끔 아쉽기도 하다.
왠지 내 밭만 초라한 것 같아
심을 때도 그랬지만, 다 심고 나서도 왠지 뒤처지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각자 미리 준비해온 상추와 가지 등 여러 모종들이 심어져 이미 꽉 찬 텃밭들을 보고 있자니, 내 밭만 텅 비어있는 모습이었다. 볼 만한 것이라곤 지원 받은 모종 다섯개가 전부였다. 아, 그리고 농장 측에서 미리 심어둔 호밀이 있었다.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주려고 심은 호밀이었기 때문에, 모종과 씨앗을 다 심고 난 뒤엔 많이 베어내어 민숭민숭해졌다.
여기서 잠깐, 알고 있으면 좋은 퍼머컬처 TIP!
사람이 땅을 뒤엎고 가는 대신, 퍼머컬처에서는 호밀을 미리 심어둔다. 호밀이 땅을 경운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뿌리를 뽑지 않고, 주로 키울 식물들과 같이 키운다. 질소 고정을 하는 역할을 하면서, 다른 식물들이 잘 자라게 도와준다. 계속 베어내다 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주력하는 식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줄어들게 된다. 호밀은 사람이 일을 적게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고마운 일꾼이다!
비교가 된다 싶으니 위축되는 느낌마저 들었다. 이상했다. 경쟁하거나 앞서가려고 텃밭을 한 게 아닌데, 그런 마음이 들다니! 마음이라는 게 참 이상한 거였다.
혼자여서 힘들었지만, 혼자가 아니야
이웃들은 모두 일행과 함께였다. 일행이 있어서 좋은 점은, 한 사람이 모종을 심는 동안 다른 사람은 물뿌리개에 물을 받아오고, 준비된 팻말에 텃밭 이름을 적거나 하는 등 일을 나눠서 할 수 있다는 거였다. 안 그래도 잘 모르고 서투른데, 혼자서 다 해야 했기 때문에 더욱 더 허둥댔다. 감사하게도, 중간 중간 오가는 선생님들의 도움을 조금씩 받을 수 있었다. 특히, 그 날 처음 만난 밭멍의 낸또는 팻말을 잘 박을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었다.
다들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하는데, 첫 날 기념 사진 한 장 정도는 남겨야 할 것 같았다. 행사가 끝난 뒤에 셀카에 도전했다. 평소에도 셀카를 찍는 일이 드물어서, 카메라를 든 것마저 어색했다. 날 보고 있던 자루가 와서 "찍어줘요?" 하더니, 엄청 예쁘게 찍어주었다.
이 사진은, 이후 토요타 측에서 주말농부들을 대상으로 연 이벤트에서 무려 2등을 하며 3만원 상당의 상품권을 받게 된다.
소셜 미디어에 올려 '좋아요'를 가장 많이 받은 순서였는데, 순전히 사진을 찍어준 자루와 하트를 뿅뿅 눌러준 주변 사람들의 덕이다.
설렘으로 시작해 혼란의 식재, 욕망의 직파를 거쳐, 귀여운 독사진으로 마무리가 된 첫날.
드디어, 퍼머컬처인으로 거듭나게 되는 걸까?! 앞으로 어떤 즐거움, 어떤 어려움을 만나게 될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지만, 한 걸음을 더 나아간 것만은 분명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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